당신은 누구인가요? ‘하나님의 형상’ 에서 답을 찾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죠. 우리는 살면서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맵니다. 사회는 성공, 지위,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라고 말하지만, 그런 것들은 늘 변하기 마련입니다. 불안한 세상 속에서 변치 않는 나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기독교 신학은 이 질문에 아주 근본적이고 깊이 있는 답을 제시합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래된 교리가 아닌 우리 존재의 핵심을 꿰뚫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 깊은 의미

26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와 닮은 모양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 땅과 땅 위에 기어다니는 온갖 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남성과 여성으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내리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번성하여 불어나라. 땅에 가득해져서 땅을 지배해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온갖 짐승을 다스려라.” (창세기 1:26-28)

성경은 인간이 특별하게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형상’은 외모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죠. 잠시 ‘형상’과 ‘모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에 대해 알아봅시다.

‘형상’과 ‘모양’

성경 원문에는 ‘형상’을 의미하는 ‘첼렘'(צֶלֶם)과 ‘모양’을 의미하는 ‘데무트'(דְּמוּת)라는 두 단어가 사용됩니다. ‘첼렘’은 본래 그림자나 구체적인 조각상 같은 것을 의미하는 반면, ‘데무트’는 유사성이나 닮음을 뜻하는 더 추상적인 단어입니다. 역사적으로 일부 교부들이나 중세 신학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여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형상’은 타락 후에도 남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성, 자유의지)으로, ‘모양’은 타락으로 상실된 도덕적 완전성으로 본 것입니다.

구분첼렘 (צֶלֶם)데무트 (דְּמוּת)
원어 의미그림자, 조각상 등 구체적인 ‘형상’닮음, 유사성 등 추상적인 ‘모양’
일부 교부/중세 신학타락 후에도 남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타락으로 상실된 도덕적 완전성

하지만 현대의 많은 구약학자들은 히브리 원문에서 이 두 단어 사이에 접속사가 없이 사용된 점(בְּצַלְמֵ֖נוּ כִּדְמוּתֵ֑נוּ)에 주목합니다. 이들은 두 단어가 별개의 개념이라기보다, 유사한 의미를 반복하여 강조하는 히브리 문학의 ‘동의적 평행법‘의 일종으로 봅니다. 즉, ‘형상과 모양‘은 “형상과 같은 닮음” 또는 “닮은 형상”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단일한 개념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

이 땅은 이제 제 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 으로 지음 받은 우리 또한 그러하다.
튀르키예에서 발견된 알렉산더 대왕의 두상. Photo: Konuralp Museum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은 당시의 문화 속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고대 왕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면, 그곳에 자신의 ‘형상’인 동상을 세웠습니다. 이 동상은 ‘이 땅은 이제 내 것이고, 내가 다스린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었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살아있는 동상’과 같다는 뜻입니다.

9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오랫동안 내가 그대들과 함께 있어요. 그런데도 나를 알지 못했나요, 필립?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어요. 그런데 바로 그대는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인가요? (요한복음 14:9)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분의 뜻에 따라 세상을 지혜롭고 자비롭게 돌보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졌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라’는 거룩한 임무, 즉 무엇을 하도록 부름받았느냐의 문제로 우리를 이끕니다.

여러 각도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형상’

신학자들은 이 형상의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1)어떤 이들은 우리의 이성, 도덕성, 자유의지 같은 내적 속성에서 형상을 찾습니다(실체론적 관점, 교부들). 또 2)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 관계를 맺는 능력 자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봅니다(관계론적 관점, 칼 바르트). 한편, 3)창조 세계를 돌보는 청지기의 역할에서 그 의미를 찾기도 합니다(기능적 관점, 소시니안).

이 세 가지 관점은 모두 중요합니다. 서로 다른 면을 비추는 보석처럼, 이 모두가 합쳐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풍성한 진리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깨어지고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

타락이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이 본래 어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지어졌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앙고백은 그 본래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되 자기의 형상대로 지식과 의와 거룩하심으로 지으사 생물을 주관하게 하셨으니…” (대한예수교장로회 12신조 中)

이 고백처럼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과 ‘의’, 그리고 ‘거룩함’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단절로 인해 죄는 인간이 가지고 있던 이 모든 것을 심각하게 훼손했습니다. 신학에서는 이 훼손의 정도를 더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나누어 보기도 합니다.

넓은 의미의 형상‘은 이성이나 양심, 의지처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기본적인 요소들입니다. 이 부분은 타락으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심각하게 부패하고 왜곡되어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해 올바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좁은 의미의 형상‘은 위 신앙고백이 말하는 ‘참된 지식, 의, 거룩함’,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던 영적인 특성을 가리킵니다. 이 중요한 부분은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구원을 이룰 수도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

그러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약성경은 바로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포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창조의 여정입니다. 이 길이 불가능하고 허황된 이야기로만 들리시나요?

예수님은 죄로 인해 아무런 소망이 없었으나, 이제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가야 할 길을 밝히 보이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는 먼저 본을 보이셨고 말씀과 기도로 그 길을 따라가는 이들을 위해 중보하시고 성령으로 한걸음 내딛을 힘을 더하십니다.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죄로 인해 깨어지고 불완전해진 '하나님의 형상' 이,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온전하게 회복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29 하나님은 미리 선택하신 사람들을 미리 정하시기를 그 아들의 모습과 같은 모양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아들이 많은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맏이가 되도록 하셨던 것이지요. (로마서 8:29)

21 이것을 위해 여러분이 부름을 받았으니까요.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받으셨으며, 따라 그릴 밑그림을 여러분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발자국을 밟아 따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1)

이 회복은 평생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 때,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늘을 살기

“기댈 데 없는 사람을 억누르면 그를 만드신 분을 욕보이는 셈이고,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 그 분을 받들어 모시는 셈이지.” (잠언 14:31)

이 모든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치는 성취나 소유가 아닌,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이것은 인종, 성별, 지위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타인의 존엄성을 지켜줄 책임으로 이어집니다.

둘째, 우리의 일은 거룩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본래 하나님이 주신 창조적인 사명입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며, 이웃을 섬기고 세상에 기여합니다.

셋째, 우리는 창조 세계를 돌보는 청지기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신 것은, 폭력적인 지배자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왕의 뜻을 따라 영토를 관리하는 청지기(steward)처럼, 하나님의 마음으로 피조 세계를 돌보고 경작하라는 책임의 위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의 환경 위기는 우리가 청지기 직분을 실패한 결과이며,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창조 세계를 책임져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글의 출발점에서 봤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어 우리는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그 답이 이미 우리 각자의 존재 안에 새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1)나 자신의 무한한 가치를 깨닫고, 2)모든 사람을 똑같이 존중하며, 3)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책임감 있게 돌보는 것,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우리다운 모습, 가장 충만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삶의 여정입니다.

당신의 모습 속에 보이는 주님의 형상 아름다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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