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가장 치열한 전쟁터는 바로 우리의 ‘몸(body)’일 것입니다. 몸은 단순히 주어진 생물학적 실체가 아니라, 사회의 권력, 정체성, 규범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고 새롭게 구성되는 장소입니다.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훈련되고, 감시받으며, 상품화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몸은 통제에 저항하고 해방을 꿈꾸는 주체의 마지막 보루가 되기도 합니다.

이 글은 몸을 둘러싼 복잡한 담론의 지형도를 세 개의 핵심적인 좌표를 통해 탐색하고자 합니다. 미셸 푸코의 ‘규율 권력’에서 출발하여 , 한국 ‘탈코르셋’ 운동의 현실적 딜레마를 거쳐 ,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라는 급진적 대안까지 따라가며, 몸의 정치가 나아갈 길을 모색해 봅니다.
1. 보이지 않는 감옥: 권력은 어떻게 우리 몸을 길들이는가?
몸에 관한 논의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는 권력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 권력은 더 이상 신체를 파괴하고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대신 군대, 학교, 공장과 같은 기관을 통해 우리의 몸을 길들이고 훈련시켜, 유순하면서도 생산적인 주체로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바로 ‘규율 권력’입니다.

그 상징적인 건축물이 바로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Panopticon)’이다. 중앙의 감시탑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된 감방. 수감자들은 자신이 언제나 감시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정작 감시탑 안의 감시자는 볼 수 없다. 이 비대칭적인 시선 속에서 수감자들은 결국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시하는 주체가 된다.
이 파놉티콘의 원리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우리는 다이어트나 자기계발처럼 ‘자발적’으로 보이는 실천을 통해, 사실상 보이지 않는 사회적 시선을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저항하려는 주체마저 권력의 장 안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는 푸코의 통찰은, 몸의 해방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출발점입니다.
2. 저항의 딜레마: ‘탈코르셋’은 해방인가, 새로운 억압인가?
푸코가 분석한 규율 권력은 한국의 ‘탈코르셋’ 운동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이 운동은 여성을 ‘여성답게’ 만들려는 사회적 ‘꾸밈 노동’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습니다.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짧게 자르는 행위는,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는 규율 권력에 대한 명백한 거부 선언이었죠.
하지만 이 해방의 실천은 곧 역설적인 비판에 직면합니다. ‘탈코르셋’이 또 다른 ‘코르셋’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짧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이라는 새로운 규범이 생겨나면서, 이를 따르지 않는 다른 여성을 ‘각성하지 못한’ 존재로 비난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해방을 위한 집단적 운동이 어떻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새로운 규범이 될 수 있는지, 그 내재적 모순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논쟁은 ‘비장애중심주의(ableism)’라는 더 깊은 규범을 드러냅니다. ‘꾸밈’을 거부하든 옹호하든, 대부분의 논의는 비장애인의 몸을 암묵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결국 ‘자연스러운 몸’을 되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또 다른 규범이거나 환상일 수 있다는 딜레마에 부딪히게 됩니다.
3. 경계를 넘어서: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라는 대안
이러한 교착 상태에서, 사상가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라는 급진적인 탈출구를 제시합니다. 그는 ‘본래의 자연스러운 몸’을 되찾자는 전제 자체를 폐기하자고 제안합니다. 대신 인간/기계, 남성/여성, 자연/문화 같은 근대적 이분법 자체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해러웨이에게 사이보그는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hybrid)이며, 우리는 이미 기술과 분리될 수 없는 사이보그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이보그에게는 되찾아야 할 순수한 기원이나 본성이 없습니다.

사이보그는 서구적 의미의 기원 신화(origin story)를 갖지 않는다. 에덴동산으로의 회귀를 꿈꾸지 않으며, 자연과의 합일을 갈망하지도 않는다. 사이보그는 단호하게 부분성, 아이러니, 친밀함, 그리고 도착성에 헌신한다.
사이보그의 정치는 ‘여성’과 같은 본질적 정체성(identity)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혈연이나 이념을 넘어 우리가 직접 선택하고 구축하는 관계망, 즉 ‘친화력(affinity)’에 기반한 연대를 추구합니다. 이는 온전하고 완벽한 몸이라는 이상을 거부하고,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며 구성된 모든 존재들(장애인, 퀴어 등)과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저항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한눈에 보는 몸 담론의 세 가지 길
구분 | 미셸 푸코 (규율 권력) | 탈코르셋 운동 (현실 저항) |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
핵심 주장 | 근대 권력은 신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유순하고 생산적인 주체로 ‘생산’한다. |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탈코르셋’)은 그 자체로 새로운 규범이 되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모순에 직면한다. |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이분법(남/여, 인간/기계)을 해체하는 ‘사이보그’라는 정치적 신화를 통해 새로운 연대의 정치를 모색해야 한다. |
핵심 개념 | 규율 권력, 파놉티콘, 유순한 신체 | 꾸밈노동, 탈코르셋, 새로운 코르셋 | 사이보그, 경계 허물기, 친화력 |
주제에 대한 기여 | 몸 담론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제공하는 이론적 토대. | 이론적 저항이 현실 정치의 장에서 부딪히는 복잡성과 내적 모순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 | 권력/저항의 이분법 자체를 넘어서려는 포스트휴먼적 대안을 제시하며 담론의 지평 확장. |
우리의 몸은 정치적 영토다
푸코가 드러낸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출발하여, ‘탈코르셋’이 시도한 탈출의 어려움을 목격한 우리는, 해러웨이가 제안한 잡종적 주체가 되어 경계 자체를 허무는 새로운 저항을 상상해야 할 지점에 서 있습니다.
몸의 정치의 미래는 하나의 ‘올바른’ 해방된 몸을 찾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규범적 권력에 맞서, 모든 비규범적이고 ‘괴물 같은’ 몸들—사이보그, 장애인, 퀴어, 인종화된 타자들 사이의 ‘친화력’을 구축하는 데 있습니다. 몸은 더 이상 규율의 대상이 아니라, 무한한 재구성과 접속의 가능성을 품은 우리의 정치적 영토가 될 것입니다. 규범의 감옥이 완전히 무너진 폐허 위에서, 우리의 잡종적이고 ‘괴물 같은’ 몸들이 마침내 함께 춤출 그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같이보기
- 박민미, 「근대 이성의 본질을 폭로하다 – 광기, 권력, 폭력」, 『프레시안』, 2025.06.28.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역, 나남, 2020
- Donna Haraway, “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Socialist Review 80 (1985): 65-108.